스포츠 담긴 책장
“나의 킥은 느리고 우아하게 너희들의 ‘코칭’을 넘어가지!”
스포츠가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운동장이 평평하기 때문이다. 룰이 보장하는 평등은 ‘드라마틱한 경쟁’의 필수조건이다. 따라서 평등의 조건을 깨려는 시도들, 금지약물 복용이나 승부 조작과 같은 행위들이 범죄로 규정되는 것이다. 우리가 즐기는 스포츠의 아름다움을 해치니까!
스포츠는 경기장이 평평할수록 아름다운 법이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스포츠는 이곳저곳 잘도 기울어져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축구는 남자의 전유물처럼 여겨진다. ‘아저씨들의 조기축구’나 ‘군대에서 축구 했던 얘기’와 같이 일상에서의 축구는 늘 남성을 연상시키거나 남성과 연관된 형태로 소비된다. 스포츠 중에서도 거칠고 무질서한 축구는 지난 시대가 남성에게 부여한 이미지와는 싱크로율이 높지만, 여성에게 부여한 이미지와는 상충된다.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 삶 곳곳에 배어있는 남성과 여성의 역할 구분, 고정된 이미지, ‘남자는 이래, 여자는 저래’하는 남성 혐오, 여성 혐오는 여성이 축구장에 들어서지 못하게 하는 높은 장벽이 되어 우뚝 서 있다.
이번에 소개할 <우아하고 호탕한 여자축구>는 30대 중반 여성(이 책의 저자인 김혼비 작가 본인)이 저 높은 장벽을 힘겹게 넘어 축구라는 세계에 들어서고, 동시에 그녀의 삶에 축구가 들어서며, “사는 옷과 신발이 달라지고, 몸의 자세가 달라지고, 마음의 자세가 달라지고, 몸을 대하는 마음의 자세가 달라지고, 축구의 경험이 쌓이는 만큼 몸과 마음의 어떤 감각들이 깨어나는 걸 느끼며, 축구가 너무 재미있어서 어쩔 줄 모르겠는 기분을 느끼며 -p.8~9” 겪은 여자축구 동호회 정착기다.
무엇보다 이 책은 세상 재미있다. 나는 누군가 책 읽기가 재미없다면 재미없는 그 책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각자에게 흥미로운 책이라면 잠도 안 자고 읽지 않을까? ‘나는 독서랑 잘 안 맞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즐거운 독서의 경험이 없었던 것은 아닌지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또, 이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유려하고 유머 있는 김혼비 작가의 글 솜씨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그녀의 ‘축구’ 이야기에 여러 번 웃고 또 가끔 울기도 하며 잃어버린 독서의 낭만을 찾을지도 모른다.
맨스플래인 VS 우먼스플래이
“나의 킥은 느리고 우아하게 너희들의 ‘코칭’을 넘어가지” page.60
“…그녀가 아무리 축구를 오래 봐 왔다고 하더라도(심지어 그 남자보다 자주, 오래 봤더라도!) 꼭 가르치려 든다. 축구 규칙이든 축구 상식이든 뭐든. 단골 질문인 “오프사이드가 뭔지 알아요?”를 시작으로, 갑자기 소크라테스 귀신이라도 붙었는지 ‘네가 안다고 믿는 것이 사실 진짜 아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겠다.’라는 철학적 일념으로 집요하게 산파술식 질문법을 펼치기도 한다. page.47
“…근데 여자 팀이랑 뛸 때는 아무래도 차이가 나니까 미안해서 그렇게 안 되더라고. 내가 보니까 이 팀도 다들 잘하시는 편인데 그래도 아쉬운 플레이들이 꽤 많다니까. 혹시 선출이세요? 그렇지? 선출이지? 그럴 거 같더라. 근데 선출들 중에 너무 멋 부리면서 축구하는 사람들이 꼭 있어요. 그냥 한 번만 꺾어도 될 건데, 왜 굳이 두 번 세 번 꺾어? page.53
편견이 이렇게 무섭다.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을 가르치려 들게 만든다. 우리는 평등한 사회에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렇게 무서운 편견과 혐오들 속에 살고 있다. 200년 전, 개인을 존중하는 시민사회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근대. 근대시대의 정신 그 자체인 헤겔(정반합의 그 헤겔 맞다)은 중국을 “공간만 있고 시간이 없는 나라”라며 동양을 혐오했고, 동시대에 이 거대한 철학자를 비판했던 또 다른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여자는 오로지 종의 번식을 위해서만 창조되었다”라며 여성을 혐오했다.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에서 흑인 노예가 해방된 지 겨우 150년 정도 지났다. 150년 전에는 피부색이 검은 사람을 같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고, 마치 동물처럼 하등이 여기는 것이 상식적인 태도였다.
생각해보면 150년 전이 그렇게 먼 과거도 아니다.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살던 시대다. 같은 미국에서 여성이 선거권을 얻은 시기는 불과 100년도 지나지 않았다. 인식의 큰 틀은 변하였을지 몰라도 여전히 우리 삶의 곳곳에는 편견과 혐오의 흔적들은 남아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 인종과 성별에 대해서 뿐 아니라 외모, 학벌, 지역, 취향 등에 대한 얼마나 많은 편견과 혐오가 편재하는가. 그리고 스포츠는 특히 성별에 대한 편견이 보다 날것의 형태로 남아있는 세계다. 헤겔이 이 책을 읽었으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경기를 지배하는 룰이 어떠한 편견도 없이 모든 선수를 동등한 조건으로 대할 때, 스포츠는 “어쩔 줄 모를 만큼” 재미있고 때로 아름답다. 스포츠는 평등할수록 아름다운 법이니까.
이 외에도,
“경기장 안에 오프더볼 상태 못지않게 경기장 밖 오프더볼 상태도 경기를 크게 좌우하는” 이야기,
“때로 유니폼의 커다란 가시성은 그 안의 개인을 지나치게 비가시화하는” 이야기,
“수년간 월패스를 통해 열어젖힌 무수한 공간”에 대한 이야기 등 축구장 안과 밖에서 벌어지는 생생한 이야기들이 이 책에 담겨있다. 축구가 얼마나 재밌는지, 독서가 얼마나 재밌는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보라.
글. 한국교육개발원 임한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