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깃든 이야기
아이슬란드에 동화 같은 꿈을 선물한 치과의사
지구촌을 뜨겁게 달군 2018 러시아월드컵이 프랑스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수많은 감동과 즐거움으로 전 세계 축구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이번 월드컵의 최대 이슈는 프랑스의 20년 만의 우승도, 독일의 예선 탈락도 아니었다. 첫 출전한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최고의 경기를 펼친 아이슬란드 대표팀이다. 끈끈한 조직력과 무한 체력으로 유로2016부터 러시아월드컵까지 이변의 중심으로 수많은 화제를 뿌려온 아이슬란드 대표팀. 그 뒤에는 아이슬란드에는 동화를, 전 세계 축구팬에게 꿈을 선물한 치과의사, 헤이미르 할그림손(Heimir Hallgrímsson) 감독이 있다.
겨울 왕국 치과의사의 기묘한 도전
순백의 눈과 얼음이 조화롭게 펼쳐진 겨울 왕국. 신비로움이 가득한 대지와 오색찬란 오로라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하늘이 매력적인 아이슬란드는 색다른 자연환경으로 전 세계 여행족의 관심을 사로잡은 나라이다. 그중 아이슬란드 대표 휴양지인 화산섬 헤이마이 에는 아주 특별한 치과의사가 있다. 헤이미르 할그림손, 아이슬란드 축구 사상 최초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시킨 전 축구대표팀 감독이다.
헤이마이에서 태어난 할그림손은 비교적 늦은 19세에 아이슬란드의 축구 클럽 ÍB 베스트만나에이야르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한다. 축구 매력에 빠져 그 즐거움에 선수생활을 이어 나갔지만 자신에게 특별한 재능이 없다고 느낀 그는 언제나 미래 진로에 대해 고민했다. 당시 떠오르던 컴퓨터공학에 관심을 가졌지만 수학을 싫어했기에 이를 포기했다. 때마침 친구의 권유로 치의학 분야를 접했고, 본인의 적성과 잘 맞는다는 생각에 치의학 공부를 시작한다. 축구선수로 활동하며 치의학 공부를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노력했고 치과의사 라이선스 취득이라는 결실을 맺는다. 축구선수와 치과의사, 두가지 직업을 가진 독특한 이력을 가진 축구선수의 탄생이었다.
20년간의 선수생활을 마치고 본격적인 치과의사로의 삶을 시작한 그에게 친정팀 ÍB 베스트만나에이야르에서 감독직을 제안한다. 그리고 이 일은 아이슬란드 축구 역사를 바꾸는 성공의 시작점이 된다. 1999년 ÍB 베스트만나에이야르 감독으로 부임해 지도력을 인정 받은 그는 2011년 아이슬란드 수석 코치, 2013년 공동 감독으로 부임한다. 당시 아이슬란드 대표팀은 스웨덴의 명장 라르스 라예르베크(Lars Lagerback) 감독이 이끌고 있었다. 공동감독체제를 발표하자 주변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들렸다. 과거 공동감독체제는 득보다 실이 많았기때문이다. 특히 감독 간의 의견충돌은 잘못하면 팀 붕괴로 이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라예르베크와 할그림손은 이러한 우려가 기우였다는 사실을 몸소 증명했다. 이 둘은 자신들의 장점인 소통과 전술 분야를 각각 전담 운영했고 서로의 의견은 공유하되 서로 존중해주는 방식으로 팀을 지휘했다.
특히 잉글랜드전 승리는 유로2016 최고의 이변이었다. FIFA 랭킹도 2012년 131위에서 2016년 35위까지 100단계 가까이 뛰어올랐다. 대회 직후 라예르베크 감독은 사임했지만, 아이슬란드의 영웅으로 떠오른 할그람손은 2018 러시아월드컵까지 계약을 연장하며 감독직을 이어간다.
우리의 전략은 아이슬란드, 전술은 팀이다
아이슬란드는 스포츠를 즐기기에 최악의 조건을 갖춘 나라이다. 인구는 서울시 도봉구 정도인 33만 8,000명에 기온은 연평균 3도 정도로 매우 춥다. 자연환경은 잔디조차 자라기 어려울 만큼 척박하며 이들의 문화는 환경 때문인지 보수적이고 투박하다. 이 때문일까. 이들의 라이프스타일에서 스포츠가 차지하는 부분은 매우 낮다. 일례로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활성화된 스포츠는 축구이지만 평균 관중은 500명을 넘지 않으며 이들은 경기를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경기장에서 피크닉을 즐긴다. 스포츠에 무관심한 아이슬란드의 문화. 이는 할그림손이 공동감독으로 부임했던 시절부터 가장 큰 고민거리 중 하나였다. 그는 아이슬란드 고유의 축구 문화를 만들고 싶어했다. 국민과 선수들이 정서적 교감을 나누고 국가적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그런 문화 말이다.
할그림손은 한가지 묘안을 생각했다. 페로 군도와의 A매치 경기를 앞두고, 팬들을 펍으로 초대한 그는 아직 언론에 공개하지 않은 선발 라인업과 상대의 약점과 강점을 분석한 내용을 팬들에게 들려주며 의견을 물었다. 이를 들은 팬들의 반응은 의외로 폭발적이었다. 그들은 대표팀의 모든 것을 공유하는 이 자리가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마치 대표팀 스태프 같은 소속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후 할그림손은 경기 전 팬들과의 만남을 하나의 문화로 정착시켰다. 팬은 계속 늘어나 서포터즈가 탄생했고, 십여 명에 불과했던 인원은 만 명이 넘는 규모로 발전했다.
이제는 감독이 팬을 찾는 게 아니라 수백 명의 팬이 감독을 만나러 오고 있으며, 아이슬란드 팬들은 유럽 전체에서 손꼽히는 열정을 보여주고 있다. 할그림손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저는 팬들에게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고, 우린 하나의 팀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작은 기회로 친밀감을 가질 수 있는 건 작은 나라의 장점이죠."라고 말하며 "우리가 1~2명의 선수에게 의존한다면, 우리는 경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패배한 셈입니다. 아이슬란드의 아이들에게도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우리처럼 작은 나라는 전략도 전술도 하나의 팀으로 완성되었을 때만 가능합니다."라고 전했다. 그의 바람은 현실로 이루어졌다. 아이슬란드는 바이킹(천둥) 박수 응원이라는 그들 고유의 응원 문화를 만들었고, 국민 전체가 팬이 되어 대표팀을 응원한다. 이제 아이슬란드는 축구 소국이 아닌 여느 대표팀보다 거대하고 강력한 하나의 팀이 되었다.
기적을 넘어 성공의 길로 들어서다
아이슬란드에 사상 첫 월드컵 진출과 유로2016 8강 진출을 선물한 할그림손. 대체 불가의 업적을 쌓은 그였기에 다음 월드컵까지 5년간 대표팀을 더 맡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그는 7년간 이어져 온 아이슬란드 축구대표팀 감독 자리에서 내려와 다시 치과의사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할그림손은 잠깐 멈추더라도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마인드로 팀을 이끌어 왔다. 그는 월드컵을 마치고 귀국 후 인터뷰에서 “성공은 목적지가 아닙니다. 아이슬란드 축구의 흥망성쇠는 이번 러시아 월드컵의 3경기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여정이기에, 우리는 항상 지금의 모멘텀을 이어갈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아이슬란드, 언더독의 사고방식입니다.”라며 앞으로 아이슬란드 대표팀이 걸어갈 비전에 대해 전했다. 그리고 대표팀의 새로운 변화를 위해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새로운 도전은 두려움이 아닌 즐거움이다
할그림손은 환자들을 상대하는 것은 축구 선수들을 상대하는 데에 좋은 연습이 되었다고 한다. "다들 치과에 가서 의자에 앉으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 아실 겁니다. 어떤 사람은 치과의사를 정말 두려워하고, 어떤 사람은 별로 개의치 않게 생각하며, 어떤 사람은 그냥 누워서 잡니다. 환자마다 성향이 다르므로 이에 맞춰 상대해야 하죠. 축구 선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선수에게는 호통을 쳐야 하지만, 어떤 선수에게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죠." 그는 이러한 경험을 자신의 장점으로 만들어 선수들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며 팀을 완성했다.
그는 새로운 도전은 두려움이 아니라 설레는 즐거움이라고 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장점이 있고 이를 활용할 기회는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취미를 만들고,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고, 새로운 도전을 즐긴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새롭게 성장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만약 할그림손이 운동과 공부 둘 중 하나만 잘했다면 지금의 성공이 있었을까. 그의 성공은 축구와 공부 두 가지 모두를 즐겼기에 가능했다. 새로운 도전은 언제나 즐거운 것이다. 이를 즐기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또 다른 잠재력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한 단계 성장한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